이제 여행작가 손미나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스페인 배낭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스페인 여행 책을 선물했다. 스페인을 거론하다 손미나의 첫 책이었던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이미 스페인을 다녀온 친구는 그녀의 여행들이 너무 부르주아적이라고 투덜댔다. 그 책에 나온 것처럼 스페인을 여행하려면 비용부터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책의 앞부분 밖에 읽어보지 않아 어쭙잖게 평할 수가 없었던 나는 친구와 공감대를 형성하지도, 작가를 옹호하지도 못한 채 각각의 수준에서 그에 맞는 여행을 즐기는 것 아니겠냐는 어정쩡한 말로 친구의 불만을 위로할 수 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번째 여행기였던 <태양의 여행자>를 읽으면서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것은 묵직한 비용이 아니라, 짧은 기간 빡빡했던 그녀의 도쿄 일정이 '책을 쓰기 위한' 여행이라는 점을 너무나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다른 여행 작가들의 여행 또한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목적이었노라고 대놓고 말하는 여행기는 김이 샜다. 책을 쓰기 위해 거니는 도쿄 거리와 얼굴이 알려진 방송인에 여행 작가라는 새 커리어를 한껏 활용한 사람들과의 만남들에, 여행자의 소박한 사유 대신 화려한 기교가 자리 잡았다. 방송국을 떠나 전업 여행 작가를 선언한 그녀의 신선한 선택에 이끌린 책치고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세 번째 책 출간 소식에도 심드렁했다. 그런데 이번엔 아르헨티나, 그것도 부에노스아이레스란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의 또 다른 제목이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던 브에노스아이레스라니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녀의 브에노스아이레스 이야기들은 기대 이상으로 훨씬 좋았다. 꼭 가보고 싶었던 아르헨티나 여행기였기 때문인지, 아무 기대 없이 읽어서인지, 세 번의 여행과 세 권의 책을 내면서 한결 풍성해진 필력 덕분인지, 아픔의 시기를 지나 한층 성숙해진 시선이 담겨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전의 의심 대신 기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우리나라에서 땅을 파면 어디에 도착할까,’라는 질문에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찾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와 정확하게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나라, 답은 바로 아르헨티나다. 꼬박 지구 반 바퀴를 날아가야 할 만큼 물리적으로는 멀리 있지만, '신의 손'이란 애칭으로 더 익숙한 세계적인 축구 선수 마라도나와 정열적인 춤인 탱고의 유명세 덕분에 그리 낯설지는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의 아름다운 자연과 따듯한 사람들에 대해 누누이 들어왔고 더 많이 궁금했던지라 이 책이 내심 더 반가웠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여행 기록인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의 이야기는 브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거닐면서, 탱고를 추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연을 가장한 다양한 필연들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낯선 풍경과 뜨거운 열정과 소박한 친절과 믿음, 삶에 대한 사유와 깨달음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거기에 아르헨티나가 걸어온 안타까운 역사와 그 속에서 피어난 독특한 문화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놓아 아르헨티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1장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곳곳에서 만나는 풍경의 조각들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시민들이 시위까지 하며 지켜냈다는 100년이 넘은 카페는 낭만을, 마라도나로 상징되는 축구장에서는 열기와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 번 맛보면 절대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아르헨티나 소고기에 대한 예찬은 육식을 즐기지 않는 나조차도 침을 꼴깍 삼키며 그 맛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반면 한때 세계 최고의 경제 부국이었으나 파격적인 이민 정책의 실패와 오랜 독재 정치로 인해 금융 위기까지 내몰린 역사는 씁쓸함을 남겼고, 예술과 일상의 공존이 독재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정열의 춤으로 대표되는 탱고에 대한 이야기로만 가득 채워진 2장. 남미 여행 에세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탱고 레슨이다. 그녀도 탱고를 배웠고, 스승의 권유로 춤꾼들이 모인다는 밀롱가의 무대에 섰다. 그리고 꼬이는 스텝에 진땀만 흘리던 초보 댄서는 어느 순간 춤과 하나가 되었고 그 벅찬 감동을 독자들과도 나누었다. 그 외에도 잠깐의 여행에서 접한 탱고에 매혹되어 평생을 탱고와 함께 하기로 했다는 한국 청년 카를로스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동양의 여행자를 위해 마지막 노래를 선사한 나이 지긋한 탱고 가수 또한 진한 향기를 남겼다.

여행의 진정한 묘미인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감에 대한 내용은 3장에서 넘실거린다. 길을 가다 우연히 올려다 본 첨탑을 매개로 대화를 나눈 폐품 예술가,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꽃미남 요리사 커플, 차랑고 연주법을 가르쳐준 욕심 없이 맑은 인디언 청년,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운전대를 잡는 택시기사 등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기나긴 시련 끝에 마침내 배우의 꿈을 이룬 빈민촌 출신 배우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고, 우연히 재회한 골든벨 스타 수영이의 역동적인 삶의 자세는 정체된 내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또한 축구장에서 거짓말처럼 만난 멘토의 소개로 이루어진 현지 신문과 방송의 특별한 인터뷰는 보통 여행자와는 사뭇 다른 저자의 특별한 위치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제대로 여행하려면 언어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도 함께!

앞선 이야기들이 모두 브에노스아이레스의 범주에서 경험한 것들이라면 4장에서는 좀 더 넓고 진한 아르헨티나를 만난 이야기로 꾸려져 있다. 일전에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펭귄이 산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면서 아르헨티나 최남단에도 펭귄이 살고 있는 빙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저자가 바로 그 최남단의 빙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가우초 청년과의 인연은 빙하에 대한 감동을 넘어 그녀에게 특별한 아르헨티나의 추억을 선사했다. 일정을 연기해 가며 아르헨티나의 진면목을 맛보려던 저자의 계획은 어이없는 사기극으로 중단됐지만, 대신 내륙의 시골 사람들로부터 배신감 이상의 포근하고 따듯한 위로를 얻는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믿음의 회복이 그녀의 험난했던 여정 속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무너진 사랑으로 괴로워하며 인생의 힘겨운 고비에 맞닥뜨렸던 저자가 날아간 곳은 달콤하고 열정적인 아르헨티나였다. 여러 인종과 가치관이 함께 공유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양한 삶의 모습과 시선을 보여주었고, 낯선 땅에서 경험하는 색다른 일들은 황폐해졌던 그녀의 가슴을 다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물론 여행 중 위험에 처할 뻔 하거나 언짢았던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불행에 자신을 잠식당하지 않고 삶이 건네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작은 여유도 얻었다. 아르헨티나는 시들어가던 그녀의 마음을 타오르는 삶의 열정으로 다시 뜨겁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열정과 감동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는 그렇게 여행 작가 손미나를 다시금 기대하게 만든 책이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햇살박이’님은?
수만 갈래로 펼쳐진 책 속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진 책 읽는 한량.